잊히지 않는 태풍의 흔적들

선교사 자녀 학교 초등 기숙사
2009년, 나는 국제학교로 돌아갔다. 선교사 자녀 학교라는 특수성이 있어 대부분 부모님과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었는데,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지만 기숙사 사감을 맡은 우리 부모님이셨기에 함께 살게 되었다. 당시 살던 브룩사이드의 집은 마당이 있고 주변에 공원도 있던, 주거 환경이 좋은 편에 속했다. 당연히 학교에서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에 가끔은 마당에서 캐치볼도 하고, 골프도 쳐보고, 공원의 축구장에서 축구도 하는 좋은 환경에서 보낼 수 있었다.
아침으로는 주로 판데살이라 불리는 필리핀 전통 빵을, 점심 저녁에는 어머니와 가정부(현지에서는 ‘아떼(ate)’라고 부르는데, 언니 또는 누나라는 뜻이다.)가 같이 한식을 준비해 주었다. 토요일에는 한인들과 함께 축구경기도 했고, 내 기억에 당시에 큰 부족함 없이 보냈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도 이전의 불성실한 모습은 없었고, 한국학교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또래들과 잘 어울리며 성실한 학생으로 유학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예견된 비극, 태풍 "온도이"
필리핀은 3월부터 5-6월까지 '건기'라고 하여 비 한방울 잘 내리지 않는 후덥지근한 날씨가 지속되다가, 7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우기'가 되면 햇빛을 보기 힘들정도로 비가 많이 온다. 그중 7월부터 9월은 태풍이 오는 시기이다. 크고 작은 태풍들이 형성되는 시기인데, 마치 구름이 끼면 비가 오듯이 당연한 일상과도 같은 연례행사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길줄은 몰랐다.
물론 배수시설이 좋지 않아 자주 물에 잠기기도 했다. 상대적 저지대에 위치한 도시여서 비가오면 당연히 잠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불편하긴 했지만, 그 땐 그러려니 했던 것 같다. 선진국도 아니니 큰 기대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2009년 9월, 잊을 수 없는 재해를 맞게 되었다.
자연에 맞선 사람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그 날은 토요일 오전, 그날따라 아버지와 형들을 따라 축구 경기에 가지 않고 푹 잤다.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고, 주변은 고요했다. 나는 폭풍전야라는 말을 몸으로 체험하게 될줄은 몰랐다. 기숙사에 남은 사람들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인터넷 게임을 해볼까 하여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어머니의 비명소리와 함께 갑자기 상황이 급박해졌다.
우리 기숙사가 있던 마을 이름이 기억나는가? 바로 Brookside, 시내 옆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을 가졌다. 기숙사도 그 시내 근처에 있었고, 태풍이 오자 시내가 범람해 마치 쓰나미 처럼, 앞집 창과 문을 쓸어버리며 우리 집에 덮쳐오는 장면을 목격한 어머니가 큰소리를 낸 것이다. 당시 어머니의 설명으론 앞집에 주차돼있던 자동차 한대가 그대로 쓸려와 우리집 정문을 치고 갔다고 하셨었다.
그렇게 물이 들어차는 광경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거세졌고, 당장 필요한 것들은 2층으로 올리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토요일, 매주 축구 경기를 하러 간 아버지와 형들이 없었고, 집에는 남자 초등생 4명, 여자 초등생 2명, 어머니와 가정부만 있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한 6학년 형이 테이프를 가져와 정문 틈을 막고 있었고, 나는 옆에서 같이 돕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주방에 내려가 식자재와 필요한 것들을 옮겼다. 사실 제일 많은 시간을 들인 것은 약간 반 지하에 있던 아버지의 책들이었다. 왜 옮기는지는 몰랐지만, 그것을 고민할 시간보단 한번이라도 더 움직이는게 중요했다.
비는 그치지 않았고, 어머니의 핸드폰은 방전되어 더 이상 전화가 되지 않았다. 당시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비가 거세게 내리기 시작하고 전화가 와서 받았는데, 어머니의 울음소리와 어떡하냐는 말이 이어지다 전화가 끊겼다고 하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2층에 모여서 물이 더 차오르기 전에 탈출할 준비를 하는 것 밖에 없었다.
창문 밖을 보면 길이라곤 보이지 않았고, 수중도시처럼 몇몇 사람들은 간이 배처럼 무언가 타고 있었다. 다행히 음식이나 조리기구를 가져와서 당장에 굶지는 않았지만,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무사히 지나가길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

그런데 저녁쯤에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셨다. 당시에는 어떻게 오실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축구장에서 거의 떠내려오다 싶이 수영하며 오셨다고 했는데, 아버지는 어머니의 전화가 그런식으로 끊겼는데 걱정돼서 안올 수 없었다고 하셨지만, 거리와 지형을 생각해보면 오고 싶다고 올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다행히 태풍은 지나가고 있었고, 집안에 물도 1층까지만 차올라서 2층에서 탈출할 필요는 없었다. 그 때 먹었던 멸치 볶음밥이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저 모두가 무사했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때의 경험은 요즘 기후 위기를 접할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하는지를 떠올리게 만든다. 특히 내 조카와 같은 어린 아이들이 이러한 경험을 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물론 이런 경험들은 어린 아이도 용기를 배우게하지만, 세상 일은 나처럼 안전하게 체험으로 그치지 않을 수 있다. 그 시절과 비교하면 나는 참 겁쟁이가 다 되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할 수록 잊고 있던 가치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당시 태풍을 같이 겪었던 형, 누나들이 사회인이 되어 어떤 사람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세삼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