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리핀으로 떠나던 날, 2007년 8월 12일
2007년 8월 12일. 필리핀으로 이민하게 되었다. 나의 해외 생활의 시작이었다. 교회의 목사님이었던 아버지였고, 사람들은 그곳으로 ‘선교활동‘을 나가는 것이라 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친구들은 내가 ‘이민‘을 간다고 했다. 하지만 ‘외국’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던 어린 나로서는, 그저 ‘이사‘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내게 있어 해외는, 식탁유리 밑에 있던 세계지도를 따라 그려보며, 각 나라의 수도이름을 외워보며 접한 것이 다였다. 오히려 그래서, 복잡한 속사정은 알지 못했기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필리핀에 도착했을 때, 내 눈앞에는 어둠이 깔려있었다. 요즘 필리핀으로 여행을 떠나본 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당시 가로등도 없던 필리핀 야경은, 우리를 맞이하러 나와주신 선교사님의 설명으로 단번에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었다. “지금 지나는 신호등이 이 도시에 유일한 신호등이에요”

만 9살 소년의 필리핀 표류기
필리핀에서의 첫날, 나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더울 뿐이었다. 나무가 더 많았고, 이름만 도시엔 곳의 야경과 함께 도마뱀들의 해드뱅잉 소리가 들려왔다. (실제로 도마뱀들이 머리를 벽에 부딪히며 소리를 내었는데, 아직도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부모님이 많이 바빠지셨다. 참고로 내 생일은 사흘 뒤인 8월 15일이었는데, 참 이상하게도 생일을 챙겨주지 못하신 것에 어떠한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가 그다음 날즈음 “초코파이로라도 생일축하를 했어야 했을까?”하는 말씀에 괜히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만 난다.
함부로 밖에 나가기엔 너무 어렸고, 가지고 놀던 장난감은 혹여 ‘공항에서 무기 모양이라고 뺏기면 어떡하지’ 하는 어린아이의 상상력 덕분에 원하는 것들을 가져오지 못했다. 정말 다행히, 부모님에게도 다행히 나는 책을 좋아했다. 필리핀에서 처음 읽은 책은 “15 소년 표류기”였다. 어린 내가 무의식적으로 내 처지를 그 소년들에게 투영했을까? 아니면 우연이었을까?
선교사 가족의 삶이란…
부모님은 선교사 자녀 학교의 기숙사 사감 겸 독서 교사로 섬기게 되었다. 자연스레 초등학생인 나는 부모님을 따라 살게 되었고, 그때부터 단체 생활을 하게 되었다. 부모님의 관심을 좀 덜 받게 되었지만, 그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 더 성숙했던 것 같다. 지금도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삶이 마냥 쉬운 삶은 아니었다. 내 주변의 같은 선교사 부모님을 둔 친구들만 보더라도, “선교사”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는, 한낱 초등학생이 견디기에는 조금 무거운 듯했다. 그래도 나는 내 부모님이 자랑스러웠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은, 동정이나 적선과는 달랐다. 마음의 여유에서 오는 것임을, 지금은 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 부모님이 싸우시던 것을 잊지는 못한다. 그분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처음 목격한 순간이었다. 어린 나와는 달리, 부모님은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았을 것이고, 아직 부모의 고뇌를 이해하기에는 지금도 난 어리다. 다만, 확실한 것은 모든 것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재정, 시간, 체력 할 것 없이 보람 하나만 바라보고 봉사를 선택한 부모님의 모습은 아마 내 평생의 자랑거리로 남을 것이다.
제2의 고향, 필리핀 안티폴로
학교에서 나는 좋은 학생은 아니었다.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음은 틀림이 없지만, 성실한 학생이라기엔 나는 무언가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수시로 멍 때리는 모습을 지적당하기도 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어보셨지만, 나도 나의 상상력을 설명할 길이 없어 얼버무렸던 기억만이 남아있다. 그때부터 나의 상상들을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면, 아마 나는 소설가가 되어있었을 것이다. 공상을 좋아하는 소년에게 필리핀 야경은 좋은 소재였다. 비록 도시로 구분되어 있었지만, 내가 있던 안티폴로라는 도시는 산에 더 가까웠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던 밤에 보던 별들과, 마당 옆 나무에 보이던 반딧불이,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도마뱀과 밤에 보이던 박쥐까지, 어린 나에게는 그저 흥미로운 것들 뿐이었다. 그렇게 나의 해외 생활은, 점점 그곳을 제2의 고향이 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