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비서로 산다는 것
선교지에 있다보면, 한국에 있는 교회들이 '선교여행'이라는 것을 우리 집에 올 때가 있다. 주로 필리핀 빈민가, 아버지의 사역지 등 여러 곳을 다니다가, 하루 이틀 정도는 관광지에서 추억을 쌓을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 아버지가 만든 선교여행 기획이었다. 중학생들, 고등학생들, 청장년 등 나이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팀이 왔었는데, 보통 한국의 방학 때마다 오기 때문에 나도 시간이 있었고, 점점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회화와 통역이 가능해져 그 일정들을 함께 하며 아버지의 비서역할을 하게 되었다. 여러 차례 관광지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레 가이드처럼 그곳의 역사, 이야기을 설명했던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 그 중 실제로 가볼만한 곳을 추려서 소개를 해보겠다.

인트라무로스와 호세 리잘의 발자국
필리핀은 333년간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그 잔해가 남아있는 곳이 바로 인트라무로스이다. 스페인 양식의 건물들과 성벽들, 거리에 있는 마차 등, 동남아에서 유럽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을 갈 때는, 보통 대성당에 유치된 박물관을 들러서 산티아고 요새를 보는 코스를 택했는데, 성당 내부의 장엄함과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곳이지만, 한편으론 같은 식민 지배를 견뎌왔다는 동질감 때문인지 굉장히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하다.
산티아고 요새에 가면, 필리핀의 국민 영웅인 호세 리잘 전시관과 그의 발자국이 남아있다. 요새 안에는 당시 쓰였던 대포같은 것들도 전시되어 있다. 스페인이 전투를 위해 준비한 요새이니 만큼 지하 감옥같은 시설도 남아있다. 그곳에 당당하게 독립 영웅인 호세 리잘의 전시관이 있는데, 그는 총칼로 싸운 위인이 아니라 깃펜으로 맞서 싸운 사람이다. 그의 시와 실제 착용한 옷가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 그의 전시관과 발자국이 있는 이유는, 그가 처형당하기 전 산티아고 요새의 감옥에 갇혀있다가, 감옥에서 처형당하는 곳까지 족쇄를 차고 걸어갔기 때문에, 이를 기리기 위해 전시관과 그가 실제로 걸어갔을 위치에 발자국을 설치해 놓았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비슷한 곳이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좋은 교육도 되었던 것 같다. 나도 실제로 많은 것을 느꼈다. 어린 시절부터 해외 생활에 한국인의 정체성을 잊을만도 했지만, 역사에 대한 공부는 조국을 잃지 않게 해주는 것 같다. 비슷한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그들이 기리는 영웅에게도 공감과 존경을 표하게 되었었다.

아바타 같은 체험, 팍상한 폭포
영화 '아바타'를 본적이 있는가? 그곳의 촬영지는 아니지만, 비슷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팍상한 폭포이다. 시기를 맞춰서 가야 절경을 볼 수 있다. 긴 협곡에 강을 따라 카누를 타고 폭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체험을 하는 곳인데, 건기에는 수량이 많지 않아서 협곡 끝에 있는 가장 큰 폭포에 가볼 수 있다.
양쪽의 절벽을 보다보면, 자연의 아름다움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행히 카누는 직접 노를 젓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변을 구경할 충분한 시간이 있다. 가끔 보이는 민가 근처엔 필리핀 전통 소, 카라바우도 눈에 띄고, 운이 좋다면 특이한 새와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커다란 도마뱀들도 볼 수 있다. 그렇게 경치를 감상하며 가다 도착하면, 폭포 안쪽 동굴로 들어가 볼 수도 있는데, 당연히 땟목에 줄을 매달고 헬멧과 구명조끼까지 안전장치는 충분하다. 그 큰 크기의 폭포를 맞아보는 경험은 정말 색다르고,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느낄 수 있다. 나는 여러번 가다 보니 감동엔 익숙해졌지만, 하지만 매번 웅장한 자연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88온천 vs Seaspring, 어디가 더 좋을까?
폭포를 즐기고 나면, 다 젖은 상태로 바람을 맞기 때문에 조금 춥다. 필리핀에서 춥다는게 좀 신기한 일이지만 액티비티를 즐기다보면 추위도 가시게 된다. 팍상한 폭포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두 리조트가 있는데, 바로 Seaspring 리조트와 88온천이다. 둘다 온천수로 되어있고, 차이점이라면 Seaspring은 좀 더 수영장 같고, 직접 음식을 사가서 해먹을 수 있는 곳이다. 컵라면, 삼겹살 등을 즐기며 직접 준비해가고 싶다면 이 리조트가 적합하다. 88온천은 한인이 시작한 리조트여서 안에 식당도 있고, 넓은 초원뷰가 인상적인 온천 수영장이다. 제대로된 자쿠지도 있고, 온천을 즐기고 싶고 조금 더 깔끔한 쪽을 선호한다면 88온천이 좋다.
라구나의 명물, 부코 파이

내가 필리핀에 갈 때마다 찾는 음식이다. 여기서 부코 Buko는 필리핀 말로 코코넛을 의미한다. 부코 파이는 즉 코코넛 파이로, 코코넛 안의 하얀 속살을 이용해 만든 파이다. 팍상한 폭포로 오가는 길에 여러 가게들이 있지만, 중간 쯤에 원조 부코파이 가게는 역시 맛이 다르다. 너무 달지도 않고, 파이지는 바삭하다. 따뜻할 때는 그 맛이 더하다. 몇몇 사람들은 코코넛 속살의 식감 때문에 호불호가 좀 있는것 같지만, 소보루 코코넛 파이는 그러한 불호도 덜했다. 지금은 팍상한 폭포로 가는 버스도 생겨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중간에 미니 부코파이도 팔고 있으니 도전해봐도 좋을 것 같다.
이 외에도 너무나 많은 관광지를 가이드 했었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필리핀에 관광지와 에피소드는 다음편에 이어서 소개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