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리핀 Cottonwood, 그곳에선 정말 순수했다.
필리핀 유년시절엔, 아무 지인이 없었기 때문에, 교류라고는 같은 선교사 자녀 학교의 선생님 부부와 자녀들이었다. 아마 필리핀 유년시절의 첫 친구였을 것이다. 마침 동갑내기 한명, 그리고 그의 동생 한명은 동네 악동들 처럼 나와 같이 어울려 지냈다. 필리핀 안티폴로는 한국과 달리 빌리지(마을)형태의 주거 공간이 많았다. 내 친구들은 Cottonwood라는 빌리지에서 살고 있었고, 나는 방학때 그들과 빈 공터에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어린 시절의 순수한 행동들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저 즐거웠다는 기억만 남아있다. 공사현장에 놓여있는 고무 파이프를 멋들어진 검으로 상상했다. 무른 흙으로 이뤄진 언덕에 올라가면 마치 그것이 삽으로 탈바꿈된 냥 계단을 만들겠다는 당찬 포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때는 그런 상상을 하면서 노는 것이 즐거웠고, 아직 공부에 대해선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요즘 초등학교 3학년을 보면, 당시의 나와는 비슷하면서도 왠지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마치 시골 소년이 도시 소년 소녀들을 보는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하지만 이런 놀이도, 방학이 끝나면 '일탈'이 되곤 한다.

First Crayons Learning Center로의 입학
필리핀 교육 시스템은 한국과 달리, 가장 더울 때인 건기의 3월~5월에 긴 방학을 가지고, 겨울에는 짧게 2주간의 크리스마스 방학을 가진다. 나와 내 친구들이 커튼우드 바로 옆, First Crayons Learning Center에 잠시 입학하게 된 것은, 내가 다니던 선교사 자녀 학교는 한국 학기제를 따랐기 때문에 겨울 방학에 영어 공부를 좀 더 하게 하려는 부모님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아마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지, 새로 사귄 친구들(계단 만들며 같이 놀았던)과 같이 들어가게 되었다.
해외에서의 초등학교, 처음에는 열심히 공부를 했던것 같다. 영어로 수업을 듣기도 하고, 필리핀 말인 따갈로그로 수업을 듣는 수업은 흥미로웠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영어라고는 abc 밖에 모르던 내게 회화수준의 레벨은 아직 벅차기만 했고, 그나마 한국의 커리큘럼이 빨랐던 수학과 음악에서 만큼은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마치 언어는 꽝이지만, 이과와 예술 분야의 천재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그 나이의 또래와 함께 있다보면, 무엇을 어떻게 하고 놀지가 고민거리였을 뿐, 아마 내 친구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선생님들은, 우리의 사정을 알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수업시간에 없어도(!)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상상이었을까, 아니면 경험이었을까
점점 수업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우리가 선택한 것은 바로 도서관을 아지트 삼아 노는 것이었다. 우리의 도서관 아지트는 재밌는 구조로 되어있었는데, 2층 구조로 이뤄져 있으면서 계단이 아니라 가운데 봉을 타고 내려갈 수 있도록 해놓았다. 마치 누군가 감시하러 들어오면 긴급 탈출이라도 하라는 듯한 요소는 우리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내 상상력이 풍부한 친구와, 그것을 곧이 곧대로 믿는 순수한 시절의 나는 도서관 문에는 의자를 아슬아슬하게 설치해 문을 열면 의자가 길을 막도록 트랩을 설치해놨고, 우리는 그 안에서 흥미로운 책들을 읽으며 상상력을 키워나갔다.
아직까지 내안에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것은, 그곳에는 상상 속 동물, 혹은 괴물에 대한 책이 수십권이 있었고, 친구들과 그 책을 읽고 난 뒤로 신기한 경험들을 했다는 것이다. 그 학교를 나오기 전까지, 나와 친구들은 특정 상황이 반복되거나 마치 시간이 되돌려진듯한 경험을 하곤 했다. 내 친구는 그것을 타임 락이라던가, 무슨 현상에 갇힌 것 같다고 했고, 실제로 그런듯 했다. 당시에만 해도 우리는 굉장히 심각했다. 이러다 시간이 영영 흐르지 않으면 어쩌지 같은 상상을 한 듯 하다.
다행히 겨울방학은 끝났고, 우리의 모험과 '일탈'도 함게 끝났다. 신기하게도, 나는 부모님께 혼나지 않았다.
그 겨울방학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 모험을 안고 필리핀에서의 삶을 이어갔다.